경주 서악동 석침총 재발굴 — 117년 만의 조사, 일정은 아직 미공개
요약
국립경주박물관이 1909년 일제가 조사한 뒤 정식 발굴보고서조차 남지 않은 신라 돌방무덤 '석침총'을 117년 만에 다시 발굴한다고 2026년 9월 10일 발표했습니다. 돌방 바닥 흙과 벽면 석회, 석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당시 출토돼 일본 도쿄대학에 보관 중인 유물의 조사·연구도 함께 추진합니다. 다만 착수일과 조사 기간, 현장 공개 여부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본문
핵심 요약
- 국립경주박물관이 경주 서악동 석침총을 117년 만에 다시 발굴한다고 2026년 9월 10일 발표했습니다.
- 착수일·조사 기간·조사 면적·현장 공개 여부는 보도자료에 없습니다. 지금 찾아가도 볼 수 있는 발굴 현장은 없습니다.
- 1909년 세키노 다다시·야쓰이 세이이쓰의 조사는 정식 발굴보고서를 남기지 않았고, 남은 자료는 일부 도면과 사진, 간단한 보고문뿐입니다.
- 이번에는 돌방 바닥 토양, 벽에 발린 석회, 돌방을 만든 석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육안으로는 안 보이는 축조·사용 과정을 확인합니다.
- 무덤 이름의 유래가 된 석침을 비롯한 1909년 출토품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 있고, 박물관은 그 유물의 조사·연구도 함께 추진합니다.
경주 서악동에 나무가 우거진 언덕처럼 보이는 봉분이 하나 있습니다. 1909년에 한 번 파헤쳐진 뒤로 제대로 된 보고서 한 권 없이 남아 있던 신라 돌방무덤, 석침총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2026년 9월 10일 이 무덤을 117년 만에 다시 발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석침총은 어떤 무덤이고, 왜 '돌베개 무덤'인가
이름부터 풀고 가는 편이 빠릅니다. 석침(石枕)은 시신의 머리를 받치는 돌베개입니다. 1909년 조사에서 무덤 안에 놓인 돌베개가 확인됐고, 그 유물 하나가 무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무덤 형식은 신라의 돌방무덤, 곧 석실분입니다. 위치는 경주 서악동, 사적 「경주 서악동 고분군」 범위 안입니다.

1909년 조사는 무엇을 남겼나
조사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1909년 일제 학자 세키노 다다시와 야쓰이 세이이쓰가 이 무덤을 열었고, 돌방과 주검받침(시상), 석침이 확인됐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정식 발굴보고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석침총을 파악하려 해도 손에 쥘 수 있는 기록은 그때 작성된 일부 도면과 사진, 간단한 보고문 정도가 전부입니다.
“1909년 조사에서는 돌방과 시상(屍床), 석침 등이 확인되었지만, 당시의 조사 기술과 기록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정식 발굴보고서도 발간되지 않았다”
그 '일부 사진'의 실물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아래는 1909년 조사에 들어가기 전 서쪽에서 바라본 석침총입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한 봉분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같은 무덤을 2026년에 찍은 모습이 아래 사진입니다. 두 장을 나란히 놓으면 그 사이에 흐른 117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미 판 무덤을 왜 지금 다시 파나
박물관이 내놓은 답은 '다시 파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검증입니다. 117년 전 일제가 남긴 신라 고분 지식을 오늘의 한국 고고학이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는 뜻입니다. 1909년 조사는 방법과 기록이 지금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무엇보다 한반도 고대 문화를 일제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해석하던 시절의 작업이었습니다.
반면 광복 이후 80여 년 사이 한국 고고학이 다루는 범위는 크게 넓어졌습니다. 무덤의 구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쌓았는지(축조기법), 장례는 어떤 절차로 치렀는지, 유물은 어디에 어떻게 놓였는지, 묻힌 사람은 누구였는지(피장자의 성격), 나아가 그 고분을 낳은 사회는 어떤 곳이었는지까지 물을 수 있는 자료와 방법론이 쌓였습니다. 이번 재발굴은 그 축적분을 가지고 과거의 조사를 다시 검증하고 필요한 부분을 바로잡는 작업입니다.
“석침총 재발굴의 목적은 1909년의 조사를 단순히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조사 성과와 한계를 넘어 광복 이후 우리가 축적한 신라 고고학의 연구 성과와 과학적 분석 기술을 바탕으로 다시 검증하는 데 있다”

1909년이 놓친 것, 2026년이 보려는 것
1909년 조사의 관심은 무덤 안의 유물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요즘 고고학이 반드시 짚는 항목들이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보도자료가 밝힌 두 시점의 차이를 항목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보도자료가 밝힌 1909년 조사와 2026년 재발굴의 차이
- 조사의 초점
- 1909년: 무덤 내부의 유물 → 2026년: 무덤이 만들어지고 쓰인 과정 전체
- 봉분
- 1909년: 축조 과정 미확인 → 2026년: 봉분 축조 과정과 돌방·봉분의 관계 규명
- 부속 시설
- 1909년: 무덤길(묘도)·둘레돌(호석) 구조 미확인 → 2026년: 두 구조를 확인
- 제사 흔적
- 1909년: 기록 없음 → 2026년: 무덤 조성 전후의 제사 흔적 탐색
- 매장시설
- 1909년: 돌방·시상·석침의 '확인'까지 → 2026년: 돌방의 구조와 축조 방법, 주검받침과 석침의 성격 재검토
- 분석 방법
- 1909년: 육안 관찰 중심 → 2026년: 자연과학적 분석을 적극 활용
- 기록
- 1909년: 정식 발굴보고서 미발간 → 2026년: 기존 기록과 실제 유구를 정밀 대조
가장 크게 달라지는 지점은 마지막 두 줄입니다. 삽과 붓만으로 하는 발굴이 아니라, 보도자료가 이름을 콕 집어 밝힌 세 가지 대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 돌방 바닥에 깔린 토양 — 무덤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의 단서
- 돌방 벽에 발린 석회 — 재료와 시공 방식, 곧 축조 기법의 단서
- 돌방을 만든 석재 — 돌을 어디서 가져와 어떻게 다듬었는지의 단서
박물관은 이 분석으로 육안 관찰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무덤의 축조·사용 과정에 관한 정보를 확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1909년 조사가 남긴 도면의 실물도 유리건판으로 전해집니다.

무덤 이름이 된 석침은 지금 어디에 있나
이번 발표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이 여기입니다. 1909년 조사 때 석침총에서 나온 유물은 지금 일본 도쿄대학이 보관하고 있는데, 박물관은 그 유물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도 이번 재발굴과 함께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무덤에 이름을 준 바로 그 돌베개를 포함한 출토품이 아직 국내에 없다는 뜻입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범위
석침총에서 나온 유물 여러 점에는 '동경제대 공과대학 소장'이라는 기록이 붙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유리건판의 설명문에 적힌 내용입니다. 다만 반환 협의나 개별 유물의 현재 소재가 발표된 것은 아니므로, '1909년 출토품이 도쿄대학에 있고 박물관이 그 유물 연구를 함께 추진한다'는 선까지가 지금 확인 가능한 사실입니다.

석침이 무덤 안에 실제로 놓여 있던 상태를 담은 사진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유물 단독 촬영본과 나란히 보면 돌베개가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감이 잡힙니다.

1909년 석침총에서 나온 것은 석침만이 아닙니다. 토기류도 있었는데, 도제개(陶製蓋)와 호(壺) 잔편이 그것입니다. 이 유물들의 유리건판 설명문에도 똑같이 '동경제대 공과대학 소장'이라는 기록이 붙어 있습니다.


무열왕릉 옆, 서악동 고분군이라는 자리
석침총이 놓인 자리를 알면 이번 조사의 무게가 달라 보입니다. 사적 「경주 서악동 고분군」은 신라 태종무열왕릉 바로 뒤 구릉에 있는 대형 고분군이고, 무열왕릉 자체도 별도의 사적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국가유산포털에 등록된 두 곳의 지정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유산포털에 등록된 두 사적의 지정 내용
- 경주 서악동 고분군 — 지정일
- 1964년 8월 29일
- 경주 서악동 고분군 — 면적·소재지
- 37,299㎡ / 경북 경주시 서악동 750번지
- 경주 서악동 고분군 — 시대
- 삼국시대 신라 (6세기 초∼7세기 중엽)
- 경주 무열왕릉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경주 무열왕릉 — 면적·소재지
- 28,487㎡ /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
- 경주 무열왕릉 — 시대
- 신라 (서기 661년경)
이만한 무게를 가진 지역인데도, 광복 이후 서악동 고분군을 체계적으로 발굴한 사례는 그 중요성에 비해 많지 않았습니다. 고분 하나하나가 언제 만들어졌고 서로 어떤 관계인지 밝히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박물관이 이번 조사를 '연구 공백을 메우는 첫걸음'으로 설명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석침총의 구조와 연대를 밝히고 주변 고분과 비교하면, 신라가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장례 방식을 바꿔 가던 과정을 새로 이해할 기초자료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한국 고고학의 뿌리는 1909년보다 92년 앞섰다
보도자료에는 뜻밖의 대목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근대적인 고고학 조사가 언제 시작됐느냐고 물으면 보통 20세기 초 일제 연구자들의 발굴을 꼽습니다. 박물관은 여기에 더 이른 사례를 보탭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입니다. 추사는 1817년 경주에 직접 내려가 신라 왕릉을 실증적으로 살폈고, 그 결과를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攷)」라는 글로 남겼습니다. 1909년 조사보다 92년 이른 시점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조산'(造山, 공원 같은 곳에 인공으로 쌓아 만든 산을 말함)으로 부르던 무열왕릉 뒤 서악동 대형 고분을 왕릉으로 판단한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탁견이었다”
사람들이 인공으로 쌓은 산 정도로 여기던 언덕을 보고 왕릉이라고 판단한 인물이 200여 년 전에 이미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박물관은 그래서 이번 재발굴에 한국 고고학의 뿌리를 되짚어 보는 의미도 함께 두고 있습니다.
지금 찾아가도 볼 수 있는 것은
보도자료에는 착수일, 조사 기간, 조사 면적, 예산, 현장 공개 여부가 전혀 담기지 않았습니다. 발굴 현장을 보러 가는 일정은 아직 잡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서악동 고분군과 무열왕릉은 평소처럼 둘러볼 수 있으니, 답사를 계획한다면 두 곳을 묶는 편이 낫습니다. 일정이 공개되면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게시판이나 국립경주박물관 누리집에 올라옵니다.
자주 묻는 질문
- Q. 석침총 재발굴은 언제 시작하나요?
- 2026년 9월 10일 발표 시점 기준으로 착수일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조사 기간, 조사 면적, 예산도 보도자료에 담기지 않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보도자료 게시판이나 국립경주박물관 누리집의 후속 발표를 확인해야 합니다.
- Q. 석침총은 어디에 있나요?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습니다.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서악동 고분군」에 속하며, 신라 태종무열왕릉 뒤 구릉에 자리한 대형 고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 Q. 발굴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나요?
- 현장 공개 계획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악동 고분군과 경주 무열왕릉은 평소대로 둘러볼 수 있어, 답사를 계획한다면 두 곳을 함께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 Q. 석침총이라는 이름은 왜 붙었나요?
- 1909년 조사에서 무덤 안에 놓인 '석침(石枕)', 곧 시신의 머리를 받치는 돌베개가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유물 하나가 무덤의 이름이 된 사례입니다.
- Q. 1909년에 나온 유물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 국립경주박물관은 1909년 석침총 조사 당시 출토돼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의 조사·연구도 함께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반환 여부나 개별 유물의 이관 계획이 발표된 것은 아닙니다.
- Q. 1909년에 누가 이 무덤을 조사했나요?
-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 두 일제 학자입니다. 돌방과 시상, 석침 등이 확인됐지만 정식 발굴보고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편집자 코멘트 · 강신욱
당장 가서 볼 수 있는 행사는 아직 없습니다. 신라 고분과 일제강점기 조사 기록에 관심 있는 분, 그리고 경주 답사 코스를 짜면서 서악동 일대를 넣을지 고민하는 분께 유용합니다. 조사 일정이 공개되면 행사·전시 일정에 올리고, 국립중앙박물관과 소속 박물관의 관람 정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안내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출처
- 원문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사적 「경주 서악동 고분군」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사적 「경주 무열왕릉」
- 국립경주박물관 누리집 (주소·대표전화 확인)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 유리건판 소장품 검색
- 국가유산포털 — 경주 서악동 고분군
위 출처를 바탕으로 네군데이 직접 확인해 정리했습니다. 원문 문장을 옮기지 않으며, 수치와 일정은 둘 이상의 자료로 확인한 것만 적습니다.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정정을 요청해 주세요.



